[시민 시인의 얼굴] 3·8 따라지의 구겨진 나날: 박남수,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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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시인의 얼굴] 3·8 따라지의 구겨진 나날: 박남수, 「몸짓」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3.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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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한 마리의 비둘기가

슬금슬금 밀치며 지분거린다.

한 마리의 비둘기가 한 마리의 비둘기를,

둘레를 빙글빙글 돌며 쪼고 있다.

무슨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한 마리는 알아차리고 조용히 몸을 숙이며

두 날개를 펼친다. 한 마리는

잔등 위에서 어기찬 하느님이 되었다. 그뿐

무슨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태초는

다만 몸짓으로 열리었던 것을.

-박남수, 「몸짓」

3·8 따라지의 구겨진 나날

김수영과 김종삼은 자기가 시인인지도 모르면서 시를 쓰는 사람이 진정 시인이라 말합니다. 우리 현대시의 총아인 그들이 시인의 배제를 좋은 시의 핵심으로 간파한 것이지요. 거슬러 가면 우리 근대 시의 출발은 너무도 자기중심적이며 비시적이었습니다. 1910년대를 근대의 출발이라 말하는 데 당시 시인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것은 소위 입신출세주의와 교양주의였습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심사였지요. 자신을 세우고 세상에 나가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심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생명과 자연과 순수를 추구하는 것만이 교양인의 덕목이라는 위선은 또 얼마나 많은 차별을 낳았는가요. 요즘 시인들도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생각하니 안쓰럽습니다. 박남수는 이 비타자적 중심에서 추방당한 시인입니다.

그는 정지용의 손을 탄 시인이고, 순수 이미지를 구가했던 모더니즘의 후예이며, 새와 아침의 시인으로 각인돼 있지요. 그렇지만 그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떠돌다 미국에서 쓸쓸히 죽었다는 사실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평양 출신으로 월남한 그가 시인으로서 남한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던 그의 시는 언어에 갇힌 가상 세계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지독한 알레고리였을까요. 시 「몸짓」은 그가 죽기 몇 해 전 1992년에 펴낸 시집 『서쪽, 그 실은 동쪽』에 실린 작품입니다. 평생 동반자였던 아내가 죽고 쓴 시입니다. 사랑을 잃은 시인의 고통이 가득 배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간 그의 방편이었던 언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몸이 기억하고 있는 순간만이 전부입니다. 말로 누군가를 규정하지 않고 말보다 앞서 그에게로 먼저 갔던 몸이 시가 되었습니다.

「구름은 바람에 실리어」란 글에서 박남수는 스스로를 3·8 따라지라 부릅니다. 월남자들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 자기 삶의 전부란 뜻이겠지요. 불우(不遇) 하다는 것은 때를 만나지 못함을 말합니다. 그의 불우함은 가난과 차별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시인으로서 누렸을 법한 기쁨이 그에게는 너무 적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시 문학은 인색하며 완고합니다. 어디 출신이, 누구 제자가, 어느 학교가 아니면 끼일 수 없는 약육강식의 밀림이기 때문입니다. 박남수의 시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맹목이 아직도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그 순수를 겨냥하지만,/매양 쏘는 것은/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새」에서)”는 뜻을 어쩌면 알 것 같지 않습니까.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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