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장미촌(薔薇村)의 왕: 황석우, 「소독회(消毒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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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시인의 얼굴] 장미촌(薔薇村)의 왕: 황석우, 「소독회(消毒灰)」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2.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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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봄죽은집에

여름이이사(移舍)와서죽고

그집에가을까지와서또죽으니

일년(一年)도못되여한집에서

생떼갓흔각성(各姓)의세송장이나갓다

한울은생각다못하여겨울의위생대(衛生隊)를보내여

대지(大地)의왼집속에흰눈의소독회(消毒灰)를뿌린다

-황석우, 「소독회(消毒灰)」

장미촌(薔薇村)의 왕

『창조』와 『폐허』 동인들이 문단을 나눠 지배하던 때 시 전문지 『장미촌』이 있었습니다. 『창조』와 『폐허』에 비하면 위상이 그만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장미촌』을 만든 황석우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창조』하면 이광수와 최남선을 금방 떠올리죠. 『폐허』에는 김억과 더불어 황석우도 참여했지만 따로 나와 『장미촌』을 만든 것이죠. 그만큼 황석우는 일제 강점기 문단의 이단아였습니다. 한참 후 1936년에 『시인 부락』 시 전문지가 생겼습니다. 한때 서정주를 시인 부락 족장으로 우리 언어의 정부라 추앙한 적이 있지요. 그에 비하면 황석우는 독보적인 장미촌의 왕입니다. 『창조』 동인들이 일본풍의 신체시를 노래할 때 황석우는 오늘날 우리 자유시를 이야기했습니다. 『폐허』 동인들이 비탄에 빠졌을 때 프랑스 상징주의를 우리 시에 안착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우리 문학 주변부일 따름입니다.

시 「소독회(消毒灰)」는 1929년 황석우의 첫 시집 『자연송(自然訟)』에 실린 작품입니다. 시집 제목에 드러나듯 자연을 찬양하는 노래를 담았습니다. 『폐허』와 『장미촌』에 실었던 시들 중 오로지 자연을 담은 시만 실었지요. 황석우는 1920년대를 거치며 퇴폐와 우울만 노래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인류’의 현실을 비판했던 터라 일제의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통해 당시 현실을 냉소하는 시를 이 시집에 담은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시 「소독회(消毒灰)」에는 우리가 접했던 자연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풍경처럼 펼쳐져 순환하고 계속해서 자기 갱신을 해 나가는 힘을 지닌 것처럼 그동안 보았는데 이 시에서 자연은 삶과 죽음이 맞물린 인간 형상을 하고 있네요.

황석우는 수많은 잡지의 산파이기도 합니다. 『폐허』, 『장미촌』, 『근대사조』, 『삼광』, 『중앙시단』, 『대중시보』, 『조선시단』 등 많은 잡지를 발간해 활동했습니다. 우리가 시험공부하며 외웠던 문인들은 대부분 소위 도련님들입니다. 김동인이 말했듯 ‘자기를 위하여 자기가 창조한 자기의 세계’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에 비하면 황석우는 버림받은 자입니다. 일찍이 조실부모했으며 불우한 환경 속에서 일본과 만주를 주유하면서도 자기 정체성과 자존감을 잃지 않고 주류 문인과 대거리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콧대 높은 시인이자 문학 제도의 설계자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죽은 일본식 자연이 없습니다. 오로지 현실을 담은 서로 돕는 자연 속에서 인간을 찾았습니다. 그가 우리 시민 문학의 시조새가 되면 안 될까요.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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